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말론 브란도 (문단 편집) == 생애와 경력 == || [[파일:external/ia.media-imdb.com/MV5BMTQ2NDc0OTMzN15BMl5BanBnXkFtZTgwMDU0NDMwMjE@._V1_SX640_SY720_.jpg|width=100%]] || [[파일:external/ia.media-imdb.com/MV5BNzQzODYxNDM4Nl5BMl5BanBnXkFtZTgwMjAwOTc5MTE@._V1__SX1857_SY927_.jpg|width=100%]] || || 스탠리 코왈스키, [[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]] (1951) || 테리 말로이, [[워터프론트]] (1954) || || [[파일:external/ia.media-imdb.com/MV5BMjA0MDIwMDYwNl5BMl5BanBnXkFtZTcwMjY0Mzg4Mw@@._V1__SX1857_SY927_.jpg|width=100%]] || [[파일:external/ia.media-imdb.com/MV5BMjE1NzM2NTIwOF5BMl5BanBnXkFtZTcwOTgyNTEzNA@@._V1__SX1857_SY927_.jpg|width=100%]] || [[파일:external/ia.media-imdb.com/MV5BMTQxMDYzODU1M15BMl5BanBnXkFtZTYwNzQ3MDU2._V1__SX1857_SY927_.jpg|width=100%]] || || 돈 [[비토 콜레오네]], [[대부(영화)]] (1972) || 폴,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(1972) || [[커츠#1에서 따온 지옥의 묵시록의 등장인물|월터 E. 커츠]] 대령, [[지옥의 묵시록]] (1979) || [[1924년]] [[4월 3일]], [[네브래스카주]] [[오마하]]에서 1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. 청소년기에는 문제아 취급을 받았으며, 보다못한 아버지의 강권으로 [[사관학교]]에 입학했으나, 이내 중퇴하고 뉴욕에 상경하여 [[뉴스쿨]]의 드라마 워크숍에 등록했다. 브란도는 거기서 스텔라 애들러 여사[* 1901.02.10–1992.12.21 [[할리우드]]의 전설적인 스타 제조기.]에게서 연기를 배웠는데 그녀는 [[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]]의 연기론을 적용하여 연기에 진정성을 불어넣기 위해 고안된 [[메소드 연기]]법을 강조했다. 한번은 애들러 여사가 수업 시간 중 제자들에게 전쟁이 벌어진 상황에서 닭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를 연기해보라 했고, 모든 학생들은 제각기 푸드덕거리는 온갖 난리 요란법석을 떨며 닭들을 연기하는데 반해 브란도 혼자만 조용히 웅크리며 [[알]]을 품는 [[닭]]을 연기했었다. 애들러 여사는 말론 브란도의 연기만 인정하며 푸드덕거리는 다른 학생들에게 "'''이 바보 멍청이들아! 닭들이 전쟁난 걸 어떻게 안단 말야!'''"라고 호통친 것은 유명한 일화다. 이렇게 브란도는 메소드 연기법에 천부적 재능이 있었고 이 연기론을 적극 수용했다. 이 당시 가장 존경하는 배우로 [[프레드릭 마치]]를 꼽았다.[* 실제로 말론 브란도는 [[프레드릭 마치]]와 [[존 가필드]]를 잇는 성격파 터프가이 배우로 꼽히기도 한다.] [[1944년]]에 《엄마를 기억해》로 브로드웨이 무대에 데뷔하였다. 1947년 브로드웨이의 연극 《[[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]]》(A Streetcar Named Desire)에서 스탠리 코왈스키 역을 맡으면서 굉장한 호평을 받았다. 그리고 이 무렵 《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》에서 자신의 대타 배우였던 [[잭 팰런스]]와 권투를 하다가 그만 코가 부러져 [[매부리코]]가 되는 사고를 겪고 말았다. 어쨌든 이로써 일약 [[브로드웨이]]의 간판스타로 자리 잡은 그를 스카웃하기 위해 [[할리우드]]는 온갖 공을 들였지만, 말론은 장기적인 계약에 따르는 제한들 때문에 모두 거절했다. 그러나 6년 후에는 그도 뜻을 굽히고 신체가 마비된 군인들의 이야기인 《맨》(1950)으로 장편 영화에 데뷔했다. 불과 1년 후, [[1951년]] 《[[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]]》(A Streetcar Named Desire) 동명의 영화판([[엘리아 카잔]] 감독)에서도 주연을 맡으면서 생애 첫 번째 [[아카데미 시상식|아카데미]]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. 장편 영화계에 데뷔한 지 1년밖에 안된 신인 영화배우가 후보에 오른 셈이다. 그 다음에는 위험한 질주(The Wild One 1953년작)에서 1950년대 막 문화의 중심으로 떠오른 청년세대의 반항기를 표현함으로서 당대 청년문화의 아이콘이 되었다. 영화에서, 도시를 휘젓던 폭주족으로 출연한 브란도는 당시 반항적인 미국의 '비트 세대'에게 우상이나 다를 바 없었고, 그의 모터사이클과 가죽자켓, 청바지, 엔지니어 부츠는 반항적인 젊은이의 상징이 되었다. || [[파일:external/theredlist.com/059-marlon-brando-theredlist.jpg|width=100%]] || || 조니 스트라블러, 와일드 원 (1953)[* 사진의 얼굴 부분이 컷아웃되어 [[비틀즈]]의 [[페퍼상사]] 앨범에 추가되기도 했다. 초기 비틀즈 멤버의 인형 뒤에 위치해 있다.] || 이 영화 속 말론 브란도의 패션은 [[매카시즘]] 시대의 청춘인 [[비트 세대]]를 대표하는 아이콘이었다. 반항아 연기로 여러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[[제임스 딘]]도 원래는 말론 브란도의 연기를 모방한 것이며, 그를 동경하며 여러 면에서 닮으려고 노력했다 한다. 1954년에는 엘리아 카잔 감독의 《워터 프론트》로 [[아카데미 시상식|아카데미]] 남우주연상을 거머쥐며 할리우드의 정상급 배우로 성장했다. 이후 동명의 뮤지컬을 영화화한 《[[아가씨와 건달들]]》(1955), 《젊은 사자들》(1958), 《[[바운티호의 반란(영화)#s-2.4|바운티호의 반란]]》(1962) 등으로 연기력과 흥행력을 과시했다. 이후 1960년대에는 다소 주춤하는 듯 했으나, 1970년대 들어 [[프랜시스 포드 코폴라]] 감독의 명작 《[[대부(영화)|대부]]》(1972), [[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]] 감독의 문제작 《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》(1973)로 화려하게 재기했다. 6년 뒤에는 [[프랜시스 포드 코폴라]] 감독의 《[[지옥의 묵시록]]》(1979)에서 카리스마적인 연기력을 보여줬으며, 《[[슈퍼맨(영화)|슈퍼맨]]》(1978)에도 [[슈퍼맨]]의 부친 조-엘 역으로 출연[* 10분 정도 출연하는 데 40억 원이 넘는 출연료를 받았고, 영화가 대박을 터뜨리자 옵션까지 붙어 총 150억 원 정도를 받았다. 자세한 건 항목을 참고할 것.]하기도 했다. 브란도는 이런 연기력을 바탕으로 [[할리우드]]에 이른바 [[성격파 배우]] 전성기를 열었던 인물이다. 그러므로 오늘날 모든 성격파 배우들은 브란도에게 빚지고 시작하는 것이다. 브란도 이전의 [[아카데미 시상식|아카데미]] 남우주연상은 언제나 정의로운 보안관이나 역사상 유명한 전쟁 영웅 아님 장애를 이겨낸 실존 인물 등등의 바른 생활 사나이들에게만 주어졌고 안 그러면 주연상 후보에도 못 오르는 게 당연시되었다. 오늘날로 치면 [[톰 행크스]] 스타일의 배우들만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거나 후보에라도 오를 수 있었던 것. 하지만 브란도는 술먹고 도박하며 마누라나 패고 처제를 강간하는 쓰레기([[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]]), 돈 받고 사람 패주는 해결사([[워터프론트]]), 깡패 두목([[대부(영화)|대부]]), [[섹스 중독]]에 빠진 중년 [[변태]]남(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), 전쟁의 광기에 미쳐버린 군인([[지옥의 묵시록]]) 등의 기존 체제에 반항하는, 홀딱깨는 비정상 캐릭터로도 얼마든지 스타가 될 수 있음을 그 스스로 증명해냈고, [[잭 니컬슨]] 같은 [[성격파 배우]]들이 설자리와 무대를 마련해주었다![* [[험프리 보가트]]는 [[터프가이]]였지 기존 체제를 완전 갈아엎자는 반동분자는 아니었다. 보가트의 대표작인 《[[몰타의 매]]》의 샘 스페이드는 '''말보단 주먹이 먼저'''인 인물이지만 엄연히 기존 체제 아래 순응하던 인물이었다! 그는 [[클린트 이스트우드]]의 [[더티 해리]]의 원조격인 인물이다.] || [[파일:external/ia.media-imdb.com/MV5BMTIyMTc4NDM1NF5BMl5BanBnXkFtZTYwODA3OTE2._V1__SX1857_SY927_.jpg|width=100%]] || || [[에밀리아노 사파타]], 비바 자파타! (1952) || 하지만 브란도는 자신에게 [[칸 영화제]]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《혁명아 자파타 Viva Zapata!》(1952)처럼, 같은 전쟁 영웅이라도 오늘날까지 역사적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역할에만 흥미를 보였고 이런 역할만 찾아다녔다. [[제2차 세계 대전]] 직후라 일본에게 노골적인 적대감을 보였던 1950년대 미국에서 과감히 일본 여인과 사랑에 빠지는 파일럿 《사요나라 Sayonara》(1957)을 연기하거나, 당시 A급 톱스타들에겐 금기시되었던 [[나치]]장교 역 <젊은 사자들 The Young Lions>(1958)도 앞장서서 거침 없이 해버리던 것이 말론 브란도였다. 그로 인해 이제 배우들의 캐릭터는 단순한 선역, 악역의 경계를 넘어서서 기존의 극연기법보다 더 현실적인 리얼리즘과 입체감을 가지게 되었다. 또한 영화사에 길이 남을 또 다른 위대한 배우, [[폴 뉴먼]]에게도 동경과 질투심을 불러 일으키고 결코 넘을 수 없다는 상실감을 안겨준 거대한 존재이기도 했다.[* 신인시절 영화사측이 뉴먼을 "제 2의 말론 브란도"라는 콘셉트으로 홍보하자 뉴먼이 크게 반발하기도 했다.] 영화 속 이미지 만큼이나 실제로도 [[반골]] 기질이 다분했고, 흑인이나 [[아메리카 원주민]] 인권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. '대부'로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을 때, 인디언 협회 대표라는 젊은 원주민 여성을 대신 내보내 수상 소감 대신 미국 내 원주민 인권 문제를 거론하게 한 것은 유명한 일화. '미국원주민운동(AIM)' 창립 멤버로 관여했고 원주민운동 지도자들의 보석금과 거처를 제공해주기도 했다. 아메리칸 원주민의 인권문제를 다룬 영화를 만들기 위해 시나리오 작업을 하기도 했고 이에 [[마틴 스코세시]] 감독도 참여했으나 아쉽게 무산되었다. [include(틀:영상 정렬, url=2QUacU0I4yU)] 1973년 아카데미 시상식 생중계 영상으로, 말론 브란도가 지명되자 아파치족 출신 인권운동가 사친 리틀페더가 침착하게 담담한 어조로 말론 브란도가 직접 작성한 연설 원고를 낭독하였다. 실제 분량은 더 길었으나 오스카 측에서 강력하게 압박을 넣어서 극히 일부분만 발언할 수 있었으며, 이마저도 사실 아예 출연하지 못할 뻔 했다. 원주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객석에서는 중간에 야유가 나오기도 했지만 이내 격려의 박수에 묻혔고, 사친의 낭독은 별 문제 없이 끝났다. 이후 오스카는 이 사건 당시 압력을 행사한 사실을 인정하고 두 인물과 인디언 인권계에 공식 사과하였다. 그가 인권운동에 열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1970년대 중반 이후의 영화 촬영계약이 개런티를 최소화 하는 대신 출연분을 단기간에 집중해서 찍는 방식이었던 데 있다. 그렇기에 사실상 브란도 필모그래피의 마지막 불꽃은 《[[대부(영화)|대부]]》와 《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》라고 볼 수 있다. 물론 커리어의 전성기가 일찍 끝난 것의 가장 큰 원인은 브란도 개인의 불우했던 신변문제와 우울증에 있었다. 1979년의 《[[지옥의 묵시록]]》이 마지막 걸작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, 체중조절에 실패하고 다소 불성실하게 촬영에 임하는 등 배우로서의 자의식과 집중력이 예전에 비해 확연히 떨어진 상태였다. 이로 인해 코폴라는 촬영에 상당한 제약을 받아야만 했으며, 수많은 재촬영과 편집을 거쳐야만 했다. 불과 30살에 [[칸 영화제/남우주연상|칸 영화제 남우주연상]], [[아카데미 남우주연상]]을 모두 수상한 천재 배우는 너무 이른 나이에 삶의 아이러니와 회의를 깨닫고 느껴버렸다. 말론이 인터뷰에서 "'''나는 배우라는 직업에 회의를 느낍니다. 배우는 아무나 하는 겁니다. [[카를 마르크스|마르크스]], [[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|간디]], [[어니스트 헤밍웨이|헤밍웨이]] 이런 사람들이 세상을 바꿉니다. 배우는 너무도 하잖은 존재입니다.'''" 이런 말을 하는 시점에서 그의 배우로서의 경력은 끝났다고 봐야한다. 본디 '''진정한 천재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자신을 죽일 수 있는 법이다.''' 말론 브란도 스스로 꼽은 자신의 최고작은 번!(Burn!)(1969)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